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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국교수교 40주년 기념 요미우리신문 강연회 '김종필 전 총리 연설문' <1>

登録日:15-06-04 13:50  照会:6,356
 
 2005년 여름, 한일국교 수교 40주년을 맞아 열린 요미우리 신문 강연회에 1962년 「金-오히라 메모」로써 韓日수교 협상의 가장 큰 장애물이던 청구권 액수를 해결한 金鍾泌 前 총리의 연설문을 공개합니다.

김종필 연설문 전문

戦中世代の夢

これから皆様に私が準備してきた話をする前に、予めご了解をお願いしたいと思います。それは、私の話が皆様の耳を痛くさせてしまうかもしれないからです。私は日本に関して少しは理解をしていて、日本が好きな方だと思っております。その私でさえこのような事を胸の中に抱いており、韓国の大勢の人々は、これ以上にこのような事を考えているという事を아뇨念頭に置いて話をお聞き頂けると幸いです。
 
여러분들에게 준비한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양해를 구하려고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은 여러분들의 귀를 아프게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에 대하여 좀 알고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저까지도 이런 것들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尊敬する中曽根総理、読売の渡辺社長、そして本日お越しの皆様!
 
존경하는 나카소네 총리, 와타나베 요미우리 사장, 그리고 방청객 여러분!
 
今年は、1905年の乙巳保護条約で韓国の自主権が日本によって剥奪されて100年、1945年の第2次世界大戦で韓国が独立して60年、1965年の韓日国交正常化を叶えて40年を迎える年です。韓日国交正常化40周年を迎えようとする時に、その交渉に携われたものにこのような発言の場を与えてくださり心より感謝申し上げます。私はこの場で、韓国と日本だけではなく、中国とアメリカの関係についても言及させて頂きます。未来を話すためには、今日と昨日の反省と論議が無ければなりません。
 
올해는 1905년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자주권이 일본에 의해 박탈된 지 100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한국이 독립을 찾은 지 60년, 1965년 韓日 수교가 이뤄진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韓日수교 40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그 교섭에 관계했던 본인에게 이런 발언의 기회를 주신 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겠습니다.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오늘과 어제에 대한 반성과 논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私は陸士同期生の約40%を韓国戦争で失った戦中世代です。私達は金日成がスターリンと毛澤東の支援を受けて起こした韓国戦争の時に小隊長·中隊長として参戦し、多くの犠牲者がでました。幸い生き残った私達青年将校は、子孫にもうこれ以上このような分断と貧しさと隸屬という負担を残したくないと誓い、国家改造の夢を抱いて朴正熙将軍を指導者とし、5·16に軍師革命を起こして政権を手に入れた後、産業化と民主化を核心とした祖国近代化の課業の成功を導きました。
 
저는 陸士 동기생 중 약 40%를 한국전쟁 때 잃은 戰中세대입니다. 우리는 金日成이 스탈린과 毛澤東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韓國전쟁 때 소대장·중대장으로 참전하여 특히 희생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우리 청년 장교들은, 후손들에게 더 이상 이런 分斷과 가난과 隸屬(예속)의 짐을 물려줄 수 없다고 다짐하면서, 국가改造의 꿈을 안고서 朴正熙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고 5·16 군사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산업화와 민주화를 핵심으로 한 조국 近代化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戦中世代から「近代化の成功」という偉大な遺産を譲りうけた私達の若者達はもう韓半島の自由統一と国家先進化へと進む道に向け走っています。21世紀のある時期に韓半島は必ず自由民主主義と市場経済という旗幟下で統一された人口8000万人の先進国として位置付けるという確信を私は持っています。
 
戰中세대로부터 「근대화의 성공」이란 위대한 유산을 이어받은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제 한반도의 자유통일과 국가 先進化로 나아가는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21세기 어느 시기에 한반도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旗幟(기치)하에서 통일된 인구 8000만 명의 선진국으로 자리 잡을 것이란 확신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今年光復60周年を迎える韓国のこのような繁栄は、1953年の相互防衛条約によって韓米安保同盟と1965年の修交による韓日友好関係を元にして叶うことが出来ました。韓国は分断で事実上島国になって大陸とを断絶されましたが、より広い自由陣営と海洋文化権の所属としてユーラシア大陸を席巻した国際共産主義の拡散を、韓半島の中間線から遮断し日本の安全と繁栄にも少なからず寄与致しました。

올해 광복 60년을 맞는 한국의 이런 번영은 1953년의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韓美 安保동맹과 1965년의 修交(수교)에 의한 韓日 우호관계를 토대로 하여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分斷으로 사실상 섬이 되어 대륙과 단절되었지만 더 넓은 자유진영과 해양문화권에 소속됨으로써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을 한반도의 중간선에서 막아내고 일본의 안전과 번영에도 적지 않은 寄與를 하였습니다.
 
私は韓日国交正常化交渉に関係し、43年前当時の大平(おおひら)外相とともに「金・大平メモ」と呼ばれる合意をしました。交渉過程で私が出会った日本の指導者達も太平洋戦争を経験した戦中世代でした。戦争の悲惨さや平和の大切さを体験を通じてわかった両国の戦中世代は、両国間の建設的な協力関係を築く事で東北亞の平和と安定を確保し、子孫達には必ず恒久的な繁栄の遺産を譲り渡そうと以心伝心で誓いました。

저는 韓日 國交정상화 교섭에 관계하여 43년 전 오히라 당시 外相과 함께 「金-오히라 메모」라고 불리는 합의를 했습니다. 교섭과정에서 제가 만났던 일본의 지도자들도 태평양전쟁을 경험한 戰中세대 출신들이었습니다.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兩國의 戰中세대는 두 나라 사이에 건설적인 協力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東北亞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여 후손들에게는 반드시 恒久的인 번영의 유산을 물려주자고 以心傳心으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日本の対韓貿易黒字2400億ドル
일본의 對韓 무역黑字 2400억 달러

 
日韓両国は、古代から現代に至るまで頻繁な文化的·人的交流を通じて東洋文明の一員となり世界史に残るほどの創造と建設の業績を残しましたが、長い侵略と支配、戦争と反目の時期がありました。
 
우리 두 이웃나라는 古代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빈번한 문화적·人的 교류를 통해서 東洋문명의 일원이 되어 세계사에 남을 만한 창조와 건설의 업적을 남겼습니다만, 침략과 지배, 전쟁과 반목의 시기도 길었습니다.
 
1965年の韓日国交正常化によって始まった新たな40年は、両国の歴史上最も成功的な協力と交流の時期だったと評価されるでしょう。韓日国交正常化が行われた1965年、両国への訪問者は1万人に達していませんでしたが、昨年は1日に1万人を超えました。今年は両国への訪問者の数が500万人を突破しそうな勢いです。
 
1965년 韓日수교로 시작된 새로운 40년은 兩國 간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協力과 교류의 時期였다고 평가될 것입니다. 韓日국교 修交가 이뤄졌던 1965년 兩國의 상호 방문자는 1만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작년 兩國 간 방문자는 하루에 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올해는 兩國 방문자수가 500만 명을 돌파할 것 같습니다.
 
両国の貿易規模は昨年、678億円に至り、日本は244億ドルの対韓貿易黒字を記録しました。韓国において日本は第一の輸入国であり、第三の輸出国です。日本は過去40年間に韓国との貿易で約2414億ドルの累積貿易黒字を挙げました。そして日本の映画が韓国で上映され、「ヨン様」·「韓流」ブームが起こり、韓国の俳優が日本で大変な人気ものになっています。

兩國 무역규모는 작년에 678억 달러에 이르렀고, 일본은 244억 달러의 對韓 무역黑字를 기록했습니다. 한국에 있어서 日本은 제1의 수입국이고, 제3의 수출국입니다. 日本은 지난 40년간 한국과의 무역에서 약 2414억 달러의 누적 무역黑字를 올렸습니다. 또한 일본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되고, 「욘사마」·「韓流」라고 하여 한국의 배우가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最近では島根県の「竹島の日、条例制定」によって始まった両国の争いにも関わらず、過去40年間着実に成長してきた両国民との交流と協力の基盤は維持されています。独島の問題で韓国で反日デモが起きた今年上半期の観光統計によると、日本人入国者数は減少するどころか、前年同期比20%以上増加し、日本を訪問した韓国人の数も大幅に増えました。

최근 시마네 縣(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으로 비롯된 兩國 사이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지난 40년간 착실하게 成長한 兩國 국민들 사이의 교류와 協力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고 작동하고 있습니다. 독도 문제로 한국에서 反日시위가 일어났던 올해 상반기 관광 통계에 따르면, 일본인 입국자 수는 줄기는커녕 前年 同期보다 20% 이상 늘었고, 일본으로 간 한국인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政府対政府の関係を超える国民と国民の間の交流と協力こそが、北東アジアの平和と繁栄を保障する日韓両国の共同資産です。両国の指導者は政治や外交よりも先に進んでいる両国の国民の経済的·文化的·人的親善協力の土台を崩さず大切にしていく責任があります。そのためには、両国の指導者が率先して正確な歴史認識を共有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정부 對 정부의 관계를 뛰어넘는 이 국민과 국민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야말로 東北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할 우리 두 나라의 공동자산입니다. 兩國의 지도층은 정치나 외교보다도 앞서 가고 있는 두 나라 국민 사이의 경제적·문화적·人的 친선 협력의 바탕을 깨뜨리지 않고 소중히 가꾸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兩國의 지도층부터가 먼저 정확한 歷史인식을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本家に対する分家の侵略
本家에 대한 分家의 침략


古代韓半島から日本に渡った人々·技術·文化が日本文明の基礎となったのは否定出来ない歴史的事実です。私は日本のジャーナリストの桜井よしこ氏が最近著書で語った事を思い出します。
 
古代에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기술·문화가 일본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저는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氏가 최근 著書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その要旨は、「人種的にモンゴルと韓国は日本人の本家である。分家である日本人はいつも本家に対して感謝する気持を持つべきであると同時に、本家である韓国人は日本列島に進出し、素晴らしい文明を作った分家の人々の進就性を評価するべきだ。」との事でした。このような両国民の人種的·地理的·歴史的な密接性がそのような相互の尊重へと発展するためには、日本側の努力が何より大事だと思います。
 
그 요지는, 『인종적으로 몽골과 韓國은 일본인의 本家이다. 分家인 일본인은 항상 本家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本家인 한국인은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찬란한 문명을 만든 分家 사람들의 진취성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兩國民의 인종적·지리적·역사적 밀접성이 그러한 상호존중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 측의 노력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할 것입니다.
 
今年日本は、日露戦争勝利100周年を迎えましたが、韓国人にとってその勝利が植民地へ進む決定的なきっかけになりました。中曽根総理も最近読売新聞で「日本はこの戦争の勝利に酔い、明治時代の苦闘を忘れ、高慢になり結局帝国主義への道へ入り込んでしまった。」とご指摘されました。

올해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100주년을 맞았습니다만,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여러분의 그 승리가 식민지로 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카소네 총리께서도 최근 요미우리 신문 기고문에서 「일본은 이 전쟁의 승리에 취하여 明治시대의 苦鬪(고투)를 잊고 교만해져 결국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韓国は日露戦争が終わった5年後、日本に合併されました。これを聞いた詩人の石川啄木は「地図上で朝鮮国を真っ黒に墨で塗りながら秋風の音を聞く」と悲しみました。
 
한국은 러일전쟁이 끝난 5년 뒤에 일본에 합병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詩人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지도상에서 조선국을 새카맣게 먹으로 덧칠해 가면서 가을바람 소리를 듣는다』고 슬퍼했습니다.
 
日本は韓国を合併させた事に続いて満州に進出し、その侵略の慣性をコントロール出来ず中国大陸へまで戦線を拡大させました。この過程で日本の指導部は日露戦争で自国を支援してくれた英国·米国から離れ、ナチスドイツとファッシイタリアにに近寄り、この外交の失敗は太平洋戦争を自招することで日本は歴史上初めて全国的規模の敗戦を経験しました。日本人を惨禍の中へ追い込んだ一連のアジア侵略の過程は、韓半島に対する日本政府の間違った歴史認識から始まったという事を強調せざるを得ません。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데 이어 만주로 진출하였고, 그 침략의 慣性(관성)을 통제하지 못하고 중국 대륙으로까지 戰線을 확대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지도부는 러일전쟁 때 自國을 지원하였던 영국·미국과는 멀어지고, 나치 독일과 파쇼 이탈리아와는 가까워졌으며, 이 외교의 실패는 태평양전쟁을 自招(자초)함으로써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全國的 규모의 패전을 경험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을 참화 속으로 몰아넣은 일련의 아시아 침략 과정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그릇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加害者の論理を捨てなければ
加害者의 논리를 버려야


日本の明治維新は、アジア最初の近代化と言われていますが、同時に富国強兵を達成した日本が帝国主義の路線に走ってしまったことで韓国·中国等アジアの国家に耐え難い苦痛を与えました。日本がこのような失敗の道を歩むことになった根本的な原因は、古代史に対する歴史認識と文化的本家である韓国と中国への有難みを忘れたからではないかと考えています。
 
일본의 明治維新(명치유신)은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라는 의미가 있으나 동시에 富國强兵을 이룩한 일본이 제국주의 路線으로 흘러감으로써 한국·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일본이 이런 실패의 길을 걷게 된 근본원인은 古代史에 대한 역사인식과 문화적 本家인 한국과 중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버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日本が韓国人の心のわだかまりを解かない限り、アジアとの和解は出来ず、国際社会の指導的位置に上る事も出来ないのです。隣国に尊重してもらえない国家がどうやって世界の指導国になれるのでしょうか。
 
일본이 한국인의 마음을 풀지 못한다면 아시아와 화해할 수 없을 것이며, 국제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오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웃나라의 존중을 받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세계의 지도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日本の一部の人達は、日本の韓半島及び満州の支配が避けられなかった理由として、朝鮮と満州が日本の「生命線」だったとか、朝鮮への介入が清から朝鮮を独立させる為であったとか主張をしています。日本の安全のためには隣国を植民地にさせることが出来、隣国を軍事力で蹂躙してもよいのだという考え方は、加害者の論理です。植民支配と侵略行為によって被害を受けた韓国と中国にこのような言動は傷をとがめるだけです。
 
일본의 일부 인사들은 일본의 한반도 및 만주 지배가 불가피했다는 이유로서 조선과 만주가 일본의 「생명선」이었다느니, 조선에 대한 개입이 淸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 주려는 의도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일본의 안전을 위해서는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고, 이웃나라를 군사력으로 유린해도 괜찮다는 이런 생각은 加害者(가해자)의 논리입니다. 식민지배와 침략행위에 의해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인들에게 이런 식의 변명은 상처를 도지게 할 뿐입니다.
 

「日本の生命線」という観念のために、何故隣の国民が死ななければ、国家の自主性を奪わ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ょうか。日本は外部の支配と侵略を受けた事がないために日本人は、特に指導者の人事は、強者·支配者·加害者の観念と論理から離れることが出来ない傾向があると私は思います。このような考え方は、日本がUN安保理の常任理事国になってから指導的な役割を担うことに決定的な足かせとなるはずです。
 
「일본의 생명선」이란 관념 때문에 왜 이웃국민들이 죽어 가야 하며 국가의 자주성을 빼앗겨야 합니까. 일본은 외부의 지배와 침략을 받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특히 지도층 인사들은 强者·지배자·加害者의 관념과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이런 시각은 일본이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고 지도적 역할을 짊어지는 데 있어서 결정적 장애가 될 것입니다.
 
西郷隆盛は日本の英雄ではありますが、韓国人にとりましては侵略の発想者つまり征韓論者として知られています。日本とアジア国家間では、国境を超えると英雄が逆徒となり、逆徒が英雄になるという歴史があります。伊藤博文は日本では明治の元勳ですが、韓国では侵略の元兇です。
 
사이고 다카모리는 여러분들의 영웅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침략의 발상자, 즉 征韓論者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과 아시아 국가 사이엔 국경을 넘으면 영웅이 逆徒가 되고, 逆徒가 영웅이 되는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에겐 明治의 元勳이지만 한국인에게는 침략의 元兇입니다.
 
私はここで日本の苛酷な韓半島の統治を想起せざるを得ません。日本人は創氏改名として韓国人が命のように重視する名字を奪いました。ハングルを使えないようにし、民族の魂を抹殺させようとしました。
 
저는 여기서 일본의 가혹한 한반도 통치를 상기시켜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創氏改名으로써 한국인들이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姓을 빼앗아 갔습니다. 한글을 못 쓰게 하였습니다. 정말 민족의 魂(혼)을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閔妃殺害
閔妃살해


私がこのような話をすると、多くの日本人は「私達は韓国に対して、植民地支配についてはもう十分謝ったのではないか。」とおっしゃいます。私を含め多くの韓国人は日本の天皇と総理の謝罪について評価しながらも、それよりもっと回数の多かったいわゆる妄言を覚えています。「総論は謝り、各論は言い訳と否定」であると韓国人は感じています。
 
제가 이렇게 말하면 많은 일본 사람들은 『우리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에 대하여 이미 사과할 만큼 했지 않은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 천황과 총리의 사과에 대해서 평가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횟수가 많았던 소위 妄言(망언)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총론은 사과, 각론은 변명과 부정」이란 것이 한국인의 느낌일 것입니다.
 
 
中曽根総理は、1986年に藤尾正行文部相が韓日合併を擁護する発言をするや否や彼を罷免させたとのですが、天皇と総理の真の謝りを無駄にしてしまう日本の一部の指導者の発言が続く限り、真の韓日協力は難しいという事を申し上げます。
 
나카소네 총리께서는 1986년에 후지오 文部相이 韓日合倂을 옹호하자 그를 파면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天皇과 총리 등의 진실된 사과를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일본 일부 지도층의 발언이 계속되는 한 진정한 韓日 협력은 어려울 것이란 점을 말씀드립니다.
 
藤尾正行文部相は、日本が韓国を植民地にしなかったとしても、結局はロシアが韓国に手を出したはずだから日本の支配は侵略だと言えないと強辯しました。

후지오 문부상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다고 해도 러시아가 결국은 한국에 손을 댔을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는 침략이라고 할 수 없다고 强辯(강변)했습니다.
 
今年は丁度朝鮮王・高宗皇后が日本の三浦語呂公使の一味によって惨殺されて110年になる年です。三浦公使の指揮下で日本の暴徒達は王宮に乱入し、寝室で皇后を殺害しガソリンで燃やしました。
 
올해는 마침 조선 高宗의 황후인 閔妃가 일본의 미우라 고로 公使 일당에 의해 참살된 지 110년이 되는 해입니다. 미우라 公使의 지휘하에 일본의 폭도들은 王宮으로 난입하여 침실에서 皇后를 살해하고 가솔린을 부어서 死體를 불태웠습니다.
 
その翌年、身の危険を感じた高宗はロシア公使館に避難しました。韓国がロシアを引き入れたのでは無く、日本のそのような行動がそうさせたのです。日本の歴史学者の井上きよしという方は次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閔妃殺害は世界中どの侵略外交でも無かった暴虐なものだった。その後、反日闘争が民中に深く拡散した。>
 
그 이듬해 신변의 위협을 느낀 高宗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란하였습니다. 한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그런 행동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란 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閔妃 살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침략외교에서도 없었던 暴虐(포악)한 것이었다. 그 후 反日투쟁이 민중 속으로 깊게 확산되었다.>
 
このような事が日本の皇居で起ったと想像すると韓国人が胸に抱いている怒りがどれほど深いものかお分かりになると思います。去る5月、閔妃暗殺に関わった暴徒の子孫が韓国に来て閔妃の墓参りをし、涙を流すのを見た韓国人達は日本人の良識が生きている事を知りました。

이런 일이 일본의 皇居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해 보시면 한국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분노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5월 閔妃 암살에 관계했던 폭도들의 후손들이 한국에 와서 閔妃의 무덤에 참배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良識이 살아 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しかし過去100年を振り返ると、韓日両国は相剋の歴史から始まり1965年の韓日修交を切っ掛けに対立しながらも共存共栄する段階に発展してきたと評価出来るでしょう。韓日国交樹立をリードしてきた朴正熙大統領と私は韓国が経済発展に成功し、軍事的·外交的にも自主自立する国で頂点に立つことが対等で生産的な韓日関係を続ける鍵だと思いました。
 
그러나 과거 100년을 뒤돌아보면 韓日 양국은 相剋(상극)의 역사에서 시작하였지만 1965년의 韓日수교를 계기로 하여 갈등하면서도 공존공영하는 단계로 발전해 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韓日 국교수립을 주도하였던 朴正熙 대통령과 저는 한국이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군사적·외교적으로도 自立·自主하는 나라로 우뚝 서는 것이 對等하고 생산적인 韓日관계를 지속시키는 열쇠라고 생각하였습니다.
 
国内外の多くの反対にも関わらず、私達は経済優先政策を推進する事でしっかりとした安保を支えることが出来、民主化の基盤を固めました。北朝鮮に対しても、韓国は決定的優位に立つようになったのです。
 
국내외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우선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결국은 튼튼한 안보를 뒷받침했고, 민주화의 토양을 마련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한국은 결정적 優位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韓日国交正常化が行われた1965年の韓国は、1人当たり国民所得が100ドル程度にしかならなかった極貧國でした。現在の韓国はGDP基準で世界第11位の経済規模、年間2500億ドルを輸出する世界12位の貿易国へと成長しました。
 
韓日국교정상화가 이뤄졌던 1965년의 한국은 1인당 국민所得이 100달러 정도밖에 되지 않는 極貧國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은 GDP 기준으로 세계 제11위의 경제규모, 年間 2500억 달러를 수출하는 세계 12위의 무역强國으로 성장하였습니다.
 
韓国は1997年に外換危機に陥った事がありますが、国民の犠牲的努力ですぐに再起し、今は外換保有高が約2000億ドルを超える国になりました。
 
한국은 1997년에 外換위기를 겪은 바 있으나 국민들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곧 再起하여 지금은 外換보유고가 약 2000억 달러를 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970年代朴正熙大統領がオイルショックを克服し、精力的に推進していた重化学工業化戦略が成功して今日の韓国は先端情報産業部門でも世界的な競争力を持っています。
 
1970년대 朴正熙 대통령이 오일쇼크를 극복하면서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던 重化學공업화 전략이 성공하여 지금 한국은 첨단정보산업 부문에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半導体Dラムの生産量·船舶建造量·超高速インターネット加入比率は世界1位、インターネット利用率は世界2位、電子製品生産量は世界3位、鉄鋼生産量は世界5位、自動車生産量と国家情報化指数は世界6位、PC普及台数は世界8位に到達しました。このような経済的成就と共に韓国は政治的な自由、国家の透明性、生活の質部門でもほぼ先進国の水準になってきています。既に一流の水準に上がっている経済·科学·軍事部門に続いて政治的·精神的な部門の先進化まで成し遂げた事で、日本に続き非西欧国家としては2番目で世界の先進国の隊列に合流する事が韓国人のビジョンとなっています。
 
반도체 D램 생산량·선박 建造量·초고속 인터넷 가입 비율은 세계 1위, 인터넷 이용률은 세계 2위, 電子제품 생산량은 세계 3위, 철강 生産量은 세계 5위, 자동차 生産量과 국가 情報化 指數는 세계 6위, PC 보급대수는 세계 8위에 도달하였습니다. 이런 경제적 성취와 함께 한국은 정치적 자유부문, 국가의 투명성, 삶의 질 부문에서도 선진국 수준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미 一流 수준으로 올라선 경제·과학·군사 부문에 이어서 정치적·정신적 부문의 先進化까지 이룩함으로써 일본에 이어 非서구국가로서는 두 번째로 세계의 先進國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韓國人 모두의 비전이 되고 있습니다.


民族的な血債
민족적 血債


朴正熙大統領が行った韓国の近代化は日本の明治維新、鄧小平の中国開放政策と共にアジア3大成功事例に挙げられているのです。韓·日·中のこの成功的な改革は、この三カ国の指導者が西欧で発展した資本主義と社会主義の無条件的な受け入れを拒否し、東道西器、または和魂洋才の哲学として先進文物を自国で主体的に変形させ応用したからこそ可能であったのです。

朴正熙 대통령이 이룩한 한국의 近代化는 일본의 明治維新, 鄧小平의 중국 개방정책과 함께 아시아의 3대 성공사례로 꼽힐 것입니다. 韓·日·中의 이 성공적 改革은 이 세 나라의 지도층이 西歐에서 발전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무조건적 수용을 거부하고 東道西器, 또는 和魂洋才의 철학으로써 선진문물을 자기 나라의 토양 속에서 主體的으로 變形시키고 응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戦国時代、斉国、管仲から始まるこのような東洋的実用政治の思想は素晴らしい合理性と科学性を持っています。これは未来でも有効な東アジアの偉大な精神的な資産なのです。北朝鮮の金正日政権だけはもう終わった共産主義を教祖的、また事大主義に従うことで後進性から脱皮出来ず住民達を飢えさせながらも核兵器の開発を強行する事で人類の平和を脅かしています。

戰國시대 齊나라 管仲(관중)에서 시작되는 이러한 동양적 實用정치의 思想은 놀라운 합리성과 과학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미래에도 有效한 東아시아의 위대한 정신적 자산인 것입니다. 북한의 金正日 정권만은 망한 공산주의를 교조적으로, 또 사대적으로 추종함으로써 후진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주민들을 굶기면서도 핵무기 개발을 강행함으로써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私は韓半島に統一国家が入ると、東アジアに平和が維持され、活発な交流下で文化と芸術が花開くという事を歴史から確認することが出来ます。7世紀末に韓半島を統一した新羅と壬申の乱を通じて執権した天武天皇下の日本は、過去の敵対関係を捨て緊密に交流しました。

우리는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들어서면 東아시아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활발한 교류하에서 문화와 예술이 꽃핀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7세기 말 한반도를 통일한 新羅와 壬申의 亂을 통해 집권한 天武 천황下의 일본은 과거의 敵對관계를 버리고 긴밀하게 교류하였습니다.
 
日本が古代国家の基盤を建てるには、まず古代国家を完成させた新羅の知識が参考になったといいます。反面、韓半島が分裂されると周辺国家の介入をもたらし、国際戦場になってしまし東アジアに不幸が招かれるというのは韓国戦争と日露戦争などが証明しています。
 
일본이 古代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데는 먼저 古代국가를 완성했던 신라로부터 배운 것이 참고가 되었다고 합니다. 반면 한반도가 분열되면 주변국가의 개입을 불러 국제 전쟁터가 됨으로써 東아시아에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은 한국전쟁과 러일전쟁 등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韓国が自由陣営の前哨基地であり日本安保の防波堤の役割を果たした去る60年間韓国の発展過程には、日本の多くの協力がありました。私は誰が何と言ってもこのような日本の協力に感謝しております。韓日国交樹立によって対日請求権資金8億ドルは、1960年代と1970年代に韓国の基幹産業とインフラ建設に投入され、日本の企業から入ってきた先進技術は韓国の経済発展に大きな助力となりました。
 
한국이 자유진영의 前哨(전초)기지이자 일본 안보의 역할을 했던 지난 60년간 한국의 발전과정에 일본의 많은 협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이런 일본의 협력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韓日 국교 수립에 의한 對日청구권 자금 8억 달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의 基幹(기간)산업과 인프라 건설에 투입되었으며, 일본 기업으로부터 들여온 선진 기술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助力이 되었습니다.

浦項製鉄の場合、初期投資額約1億3000万ドルの請求権資金は「民族的 血債」と呼ばれ、この会社を世界的な企業にする事に寄与しました。韓日交流は施惠や從屬の一方的な言葉としては説明出来ない両面性を持つ事となり、結局は両国の相互利得に戻ってきています。

浦項제철의 경우 초기에 투자된 약 1억3000만 달러의 청구권 자금은 「民族的 血債」로 불리면서 이 회사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는 데 기여했습니다. 韓日교류는 施惠(시혜)니 從屬(종속)이니 하는 일방적 낱말로써는 설명될 수 없는 양면성을 띠게 되었고, 결국은 양국의 相互 이득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韓·日·中のGDP、アメリカを凌駕
韓·日·中의 GDP, 미국 능가


日本と韓国に続いて中国が素晴らしい高度経済成長を続けることで、北東アジアは世界で一番力動的な地域になりました。購買力(PPP: Purchasing Power Parity)を基準にした場合、韓国·日本·中国、この3カ国の国民総生産は約12兆ドルに達し、11兆ドルのアメリカを凌駕する事になりました。韓中貿易額は約2000億ドルで、史上初の対日貿易額を追い抜きました。
 
일본과 한국에 이어 중국이 놀라운 고도 경제성장을 계속하면서 東北亞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이 되었습니다. 구매력(PPP: Purchasing Power Parity)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日本·중국, 이 세 나라의 國民총생산은 약 12조 달러에 달해 11조 달러의 미국을 능가하게 되었습니다. 日中 무역액은 약 2000억 달러로서 사상 최초로 美日 무역액을 앞질렀습니다.
 
韓中貿易額も794億ドルを記録し、韓米貿易額を超えています。昨年日本は250億ドルの対中貿易赤字を記録しました。アメリカも中国に対して1650億ドルの貿易赤字になりました。一方で韓国は、中国に対して約200億ドルの貿易黒字、日本に対して240億ドルの貿易赤字になりました。
 
韓中 무역액도 794억 달러를 기록하여 韓美 무역액을 초과하고 있습니다. 작년 일본은 250억 달러의 對中 무역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미국도 중국에 대해서 1650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보았습니다. 한편 한국은 중국에 대해서 약 200억 달러의 무역흑자, 일본에 대해서는 240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냈습니다.
 

こうして韓·日·中、アジア3カ国の関係は密接な関係へと発展し、さらにアメリカを加えると、この4カ国は一種の太平洋4ヶ国経済共同体を構成しています。韓·日·米·中の四つ国のGDPを合算すれば世界全体の半分を超えます。
 
이렇게 하여 韓·日·中, 아시아 3國 관계는 밀접한 관계로 발전하였고, 여기에다가 미국을 더하면 이 4國은 일종의 태평양 4國 경제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韓·日·美·中 이 네 나라의 GDP를 합산하면 세계 전체의 반을 넘어섭니다.
 

今年悪化した韓·日·中の外交関係はこのような密着した経済的構造を超えられず、その緊張が緩和に向けています。中国も年間約2000億ドルの貿易黒字となるアメリカと日本に対し、敵対政策を続けることは難しいでしょう。
 
올해 악화된 韓日·日中의 외교관계는 이렇게 밀착된 경제적 구조를 뛰어넘을 수 없어 그 긴장이 완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中國도 年間 약 2000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自國에 선물하는 美國과 日本을 상대로 敵對정책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このような北東アジアの協力体制を構築するための第一歩として、私は総理時代アジア金融機構、AMF(Asia Monetary Fund)の創設を提案して参りました。私はこの機会に太平洋4ヶ国経済共同体の持続的な繁栄の為に、いくつかの提案をしたいと思います。
 
이런 東北亞의 협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첫 작업으로서 저는 총리 시절 아시아금융기구, 즉 AMF(Asia Monetary Fund)의 창설을 제안한 바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태평양 4개국 경제공동체의 持續的(지속적) 번영을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합니다.
 
まず、北東アジアの韓·日·中3カ国の共存共榮のためには、必ずアメリカの参加が必要です。アメリカを抜きにしては北東アジアの繁栄と平和を論じる事は無意味な事です。韓米同盟と日米安保協力体制は、韓半島の統一以後にも続けていくべきだと考えます。
 
첫째, 東北亞의 韓·日·中 세 나라의 共存共榮을 위해서는 반드시 미국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美國을 제외한 채 東北亞의 번영과 평화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韓美동맹과 日美 안보협력체제는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次に、第一次世界大戦の教訓を指摘したいと思います。大戦以前のヨーロッパは経済的な交流は活発でしたが、これを管理する安保協議体がありませんでした。従ってオーストリア皇太子が暗殺される予期せぬ不祥事をコントロールできず、様々な国が望まない戦争に連鎖的に巻き込まれたのです。この教訓を前提に、韓·日·美·中の太平洋4大国家間の危機を管理出来る機構があるべきで、特に国家指導者同士で定期的なコミュニケーション体制がしっかりと作られるべきであります。

둘째,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大戰 이전의 유럽은 경제적 교류는 활발했지만 이를 관리할 安保협의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는 예기치 못한 불상사를 통제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들이 원하지 않은 전쟁에 연쇄적으로 휘말려 들었던 것입니다.이 교훈을 바탕으로 韓·日·美·中의 태평양 4大國 사이에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기구가 존재해야 하며, 특히 국가 지도자 사이의 정기적인 대화 체제가 견고하게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最後に、この150年間、民主主義国家と民主主義国家は一度も戦争をしていないという事実に注目してください。北東アジアの繁栄を持続させるためには韓国と日本の民主主義がさらに成熟し、中国の民主化が根を下ろし、北朝鮮の独裁政権が変わ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韓国·アメリカ·日本が域内の民主化を促進させるべき理由は、それがこの地域の平和と直結されるからです。
 
셋째, 지난 150년간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는 전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 주시길 바랍니다. 東北亞의 번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중국의 민주화가 자리잡고, 북한의 독재정권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미국·일본이 域內의 민주화를 촉진시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 지역의 평화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自由の拡散
자유의 擴散


韓国での最近の反日デモについては、韓日両国民の冷静な対応が出来たのも民主主義への信頼があった為だと思います。韓国人は日本の独島領有権主張に怒りを持ちながらも、政府の下手な対日政策については公開的な批判を止めませんでした。両国民のこのような成熟した姿勢が外交摩擦を緩和させ交流と協力を続けているのです。
 
한국에서의 최근 反日시위에 대해서 韓日 양 국민들이 여유 있는 대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분노하면서도 정부의 세련되지 못한 對日 정책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양 국민들의 이런 성숙한 자세가 외교마찰을 완화시키면서 교류와 협력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東北アジアの恒久的な平和は、金正日政権の民主化無しでは不可能です。金正日政権の核兵器開発と人権弾圧、そして日本人及び韓国人拉致行為の原因はこの政権の本質である独裁性です。しかし金正日政権は簡単には崩壊しません。予測できない金正日政権を相手に解決策を推進するにあたって、その方法が平和的でなければいけないという点が、世界中の悩みとなっています。
 
東北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는 金正日정권의 민주화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金正日 정권의 핵무기 개발과 人權탄압, 그리고 일본인 및 한국인 납치행위의 原因은 이 정권의 본질인 독재성입니다. 하지만 金正日 정권은 쉽게 붕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측불가능한 金正日 정권을 상대로 해결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 방법이 평화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세계의 고민이 있습니다.
 
現在、6者会談は会談の為の会談に留まっています。機能しておりません。核兵器として世界に脅威を与えている金正日政権に対して、何の得るものもないのに全て会議を通じて平和的に解決しようと言いながら彼らに時間の余裕を与えているのか、その理由が全く分かりません。そうするうちにむしろ北朝鮮政権の方から決断を強要される状況になるかも知れません。
 
지금 6者회담은 회담을 위한 회담에 머물고 있습니다. 기능하지 않고 있습니다. 핵무기로써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金正日 정권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할 것이 있다고 모든 것을 회의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면서 그들에게 시간의 여유를 주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북한 정권으로부터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강요당하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私は北朝鮮の核兵器問題を一日も早くUN安全保障理事会で国際社会が団結した姿で問題解決に向かうのが望ましいと思います。
 
저는 北韓 핵개발 문제를 하루속히 유엔안전보장이사회로 가져가서 국제사회가 단결된 모습으로 문제해결에 나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国際共産主義者からの侵略を防ごうとした韓国戦争が、韓国の力だけでは耐え難かった事と同時に、韓国の統一は韓国人の力だけでは難しいでしょう。韓半島の分断と同じ民族が争う悲劇は日帝の韓半島支配と第2次世界大戦の戦後の処理が招いた結果です。日本に責任がないという事はあり得ません。韓国が主導する南北統一の過程に日本が積極的に協力する事は、このような歴史的な借りを返す事にも繋がる事でしょう。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했던 한국전쟁이 韓國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과 같이 한국의 통일은 韓國人의 힘만으로써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반도 分斷과 同族상잔의 비극은 日帝의 한반도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의 戰後처리가 불러온 결과입니다. 일본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이 主導할 南北韓 통일과정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빚을 갚는 일도 될 것입니다.


日本への不信
일본에 대한 不信


日本に対する韓国人の怒りと韓国への日本人の軽蔑感がまだまだ残っていた1965年に、韓国と日本は対等な国家関係を結びました。この国交正常化に関わった一人として私は国交樹立に際した朴正熙大統領の談話文をいまだに覚えています。朴大統領はこう言いました。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와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경멸감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던 1965년에 한국과 일본은 대등한 국가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국교정상화에 관계했던 한 사람으로서 저는 국교수립에 즈음한 朴正熙 대통령의 담화문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私は我が国民の一部が韓日交渉の結果が屈辱的だとか低姿勢とか、さらに売国的だとまで極言する人がいるということを良く知っています。彼らの主張が本心で、私達がまた日本に侵略される事を怖がり、経済的に隸属になる事を心配のであるならば、私は彼らに聞きたいです。
 
『나는 우리 국민 일부 중에 韓日교섭의 결과가 굴욕적이니 低자세니 심지어 매국적이라고까지 極言(극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진심으로 우리가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경제적으로 예속이 될까 걱정을 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どうして彼らはそのように自信がなく被害意識と劣等感にとらわれ、日本を無条件に怖がってしまうのかという事です。このような卑屈な考え、これこそまさに屈辱的な姿勢だと指摘したいのです。
 
어찌하여 그들은 그처럼 자신이 없고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日本이라면 무조건 겁을 집어먹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비굴한 생각, 이것이야말로 바로 굴욕적인 자세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
 
私はこの機会に日本の国民にも一言明らかにしておきます。過去に日本が犯した罪過が、今日の日本の国民や今日の世代に責任があるとは考えてはおりません。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국민들에게도 한 마디 밝혀둘 일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罪過(죄과)들이 오늘의 日本 국민이나 오늘의 세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しかし、「日本はやはり信じられない国だ」という日本い対する不信感が我が国民の胸に再びわいてしまうと今回締結した全ての協定は何の意味も無くなってしまうという事をこの機会に改めて明らかにしておきます。」
 
그러나 「일본은 역시 믿을 수 없는 국민이다」 하는 對日 不信감정이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또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번에 체결된 모든 협정은 아무런 의의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 거듭 밝혀 두는 바입니다.』
 
幸いにも韓国人の日本人に対する劣等感と敗北意識もうほとんどなくなりました。不幸にも日本の一部の指導的立場の人達は、韓国と中国人の心を傷つけるなど、日本に不信感を助長する言動を繰り返して来ました。このような人々にはこう言っておきたいです。「言っていい事と、胸に秘め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事の区別が出来ないのか」と。
 
다행스럽게도 韓國人의 일본인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의식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불행하게도 일본의 일부 지도적 인사들은 한국과 중국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써 일본을 不信케 하는 言動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두고 싶습니다. 「말해야 되는 것과 가슴속에 묻어 두어야 하는 것을 구별할 수는 없는가」라고 말입니다.
 
創氏改名と韓国語抹殺政策に対する弁明、強制的に連行された従軍慰安婦の存在否定、徴兵、徴用された人への無視、韓中両国民に苦痛を抱かせた戦犯達の位牌がある靖国神社に向けた日本国家指導部の参拝、独島領有権主張、日帝の侵略行為を弁明する教科書の採択問題など、日本の一部の指導的立場の人達はまだ、東アジアの人々の心で癒えていない歴史的な傷を悪化させる行動を続けています。
 
創氏改名과 한국어 말살정책에 대한 변명, 강제 동원된 從軍위안부의 존재에 대한 부정, 징병·징용된 사람들에 대한 무시, 韓中 양국 민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 戰犯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神社에 대한 일본 국가 지도부의 참배, 獨島 영유권 주장, 日帝의 침략행위를 변명하는 교과서의 채택 문제 등 일본의 일부 지도적 인사들은 아직도 東아시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아물지 않고 있는 역사적 상처를 도지게 하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最近では島根県の「竹島の日を定める条例」で、韓日関係を悪化させた出来事がありました。今回の教科書検定過程には日本の公務員が介入し、教科書の製作者が記述した「独島が韓日間の紛争地域」という表現を「独島は日本の領土」に変更するよう求めたという話を聞きましたが、これが事実ではない事を望みたいです。
 
최근 일본 시마네 縣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으로 韓日관계를 악화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일본의 공무원들이 개입하여 교과서 제작자 측이 記述한, 「獨島가 韓日 간의 분쟁지역」이란 표현을 「獨島는 일본의 영토」라는 식으로 바꾸도록 작용했다는 말도 들었지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この場においては、韓国が実効的に支配している独島問題を深く言及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が、いくつかだけ指摘したいと思います。
 
이 자리에서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獨島문제를 깊게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몇 가지만 지적해 두려고 합니다.


独島問題は、未解決が解決策
獨島문제는 未해결이 해결책


日本が1905年になってこの島を自分の領土に編入したという主張は、言い換えるとその前は日本の領土ではなかったという自白にすぎません。日本政府は、独島が「歴史的」に日本の領土であったと主張していますが、その歴史というものは1905年以後の事を意味します。
 
일본이 1905년에 와서 이 섬을 자신의 영토에 편입했다는 주장은 말을 바꾸면 그 전에는 일본 영토가 아니었다는 自白에 다름 아닙니다. 일본 정부는 獨島가 「역사적」으로 일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역사란 것은 1905년 이후를 의미합니다.
 
韓国は6世紀の新羅時代から独島を領有し、管理してきたからこそ別の領土編入を宣言する必要が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空島政策によって開拓政策に変わった1900年に、大韓帝国政府は、勅令第41号として独島(当時名称は「石島」)をウルン郡守の管轄範囲と明記しました。
 
한국은 6세기 신라 시대부터 獨島를 영유, 관리해 왔기 때문에 별도로 영토편입을 선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空島정책을 쓰다가 개척정책으로 바꾼 1900년에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41호로써 獨島(당시 명칭은 「石島」)를 울릉군수의 관할범위로 명시하였습니다.
 
日本の領土編入措置よりも、5年も早かったのです。これによって1906年に日本の島根県が独島を日本の領土だと知らせていた時に、大韓帝国はこの勅令によって我が領土であるという事を明らかにしたのです。
 
일본의 영토편입 조치보다도 5년이나 빨랐습니다. 이에 따라 1906년에 일본의 시마네 縣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통보해 왔을 때 대한제국은 이 칙령에 따라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次に、朝鮮王朝実録及び備辺司謄録のような国家文書には、ウルン島と独島が明記されており、官撰地図にも出てきます。1877年の明治政府は、記録ではウルン島と独島が「朝鮮の領土」または、「日本領土外の地域」と書かれています。日本の官撰地図でも独島は日本の領土ではないと記されています。
 
다음으로 조선왕조실록 및 비변사 謄錄(등록)과 같은 국가 문서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明記되어 있고, 官撰 영토지도에도 나타납니다. 1877년 明治정부는 기록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 또는 「일본영토 외의 지역」으로 적었습니다. 일본의 官撰 영토지도에서도 獨島는 일본 땅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最後に、日本が日露戦争中に独島を占領していたのは、5年後の韓国併合への最初の措置でした。日本は日露戦争を開戦してすぐに朝鮮を軍事的に占領し、外交権を剥奪してしまいました。このような状況で、独島を島根県に編入させた行為は、朝鮮半島合併の第一歩でした。従って、日本が独島の領有権を提起すればするほど韓国人の胸に秘められた「不幸であった過去」を思い起こせる事になるのです。
 
셋째,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獨島를 빼앗아 간 것은 5년 뒤 韓國倂合의 첫 조치였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開戰하자마자 조선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외교권을 박탈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獨島를 시마네 縣으로 편입시킨 행위는 한반도 병합의 一步였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獨島 영유권을 제기하면 할수록 한국인들은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불행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独島の韓国領有は、このような歴史的·地理的·文献的に確かな事です。日本政府は、韓国と戦争をしない限り独島を奪い取ることは出来ません。この石島をおいて戦争なんかできますか。できません。この問題をこのように提起するのは賢明ではありません。日本は独島領有権の主張を諦めるのか、それが出来なければ現状を認め、今のように未解決状態にする「未解決の解決」は不可能なのかどうか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
 
獨島의 한국 영유는 이처럼 역사적·지리적·문헌적으로 확실합니다. 일본 정부는 한국과 전쟁을 하지 않는 한 獨島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 돌섬을 놓고 전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일본은 獨島 영유권 주장을 과감히 포기하든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현상을 인정하고 지금처럼 미해결 상태로 놓아 두는 「미해결의 해결」은 불가능한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TOTAL 3,869 

NO 件名 日付 照会
1549 아베정권 지지율 40% 밑으로 하락 2015-06-23 7415
1548 한일관계 악화에 따른 대일 비즈니스 동향 2015-06-18 5253
1547 日원자력발전 재가동 시기 지연 2015-06-18 4555
1546 성장하는 일본의 건강보조식품 시장, '기능성표시'제품 발매 2015-06-17 4805
1545 日 5월 무역수지 2,160억엔 적자 2015-06-17 4556
1544 日기업, 한국 메르스 확산 우려 2015-06-16 12511
1543 일본경제 주간동향 (6.6-6.12) <주일대한민국대사관 제공> 2015-06-15 3901
1542 日2015년 1~3월期 GDP 전기대비 1.0% 증가 2015-06-12 4363
1541 日기저귀 시장, 외국인 특수로 성장 2015-06-12 6646
1540 일본경제 주간동향(5.30 - 6.5) <주일대한민국대사관 제공> 2015-06-10 4367
1539 일본·해외 기업들, 사프社 퇴직 기술자에 주목 2015-06-08 5008
1538 한일국교수교 40주년 기념 요미우리신문 강연회 '김종필 전 총리 연설문' <2> 2015-06-04 4673
1537 한일국교수교 40주년 기념 요미우리신문 강연회 '김종필 전 총리 연설문' <1> 2015-06-04 6357
1536 日샤프社 강도 높은 경영재건계획 추진 2015-06-04 4721
1535 日 2년 만에 실질임금 플러스 전환 2015-06-03 4423
1534 '제47회 한일경제인회의' 공동성명안 <한일경제협회 제공> 2015-06-02 4656
1533 日 수입 LNG탱크 인증관련 규제완화 추진 2015-06-02 4229
1532 일본경제 주간동향(5.23 - 5.29) <주일대한민국대사관 제공> 2015-06-01 5446
1531 日대기업 여름 상여금, 7년만에 평균 90만엔 2015-06-01 5285
1530 일본 가전산업의 글로벌 추락 원인 및 최근 동향 2015-05-29 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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